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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한인사는 강영승 박사의 가족들이 시카고에 머물면서 그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의 맏아들 제임스 강씨는 공장 감독으로 일했고, 셋째딸 에스터 강은 치과의사인 남편(Fred Ohr)과 함께 시카고 한인사회의 기원을 이루었다. 1930년 그녀가 남편과 함께 시카고에 정착했을 때 한인들은 주로 하와이 농장 이민을 거쳤거나 유학생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김경, 박필, 정태은, 오한수, 김홍기, 조종진, 황휘 등이 사업을 하고 있었고 유학생으로는 염광섭, 황창하, 현정염, 김여택등 10여 명이 있었다.
1918년 10월 8일 시카고 한인 학생회가 조직되었고, 1920년 4월 6일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학생총회 결성대회에 시카고에서는 강영승, 양영진, 현승염, 현정염 4인이 발기인으로 참석했다. 1921년 4월 30일 뉴욕에서 북미 유학생 총회가 정식 결성되었고 학생회 총회본부를 1923년 시카고로 이전하면서 회장에 염광섭, 부회장에 황창하가 책임을 맡았다. 이 시기가 현재의 시카고 한인 제일연합감리교회의 설립시기 전후로 학생회 리더들이 교회 창설 발기인으로 관여했다. 에스터 오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한인제일연합감리교는 1919년 미국 감리교단 국내선교부의 후원으로 첫 기도 모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1923년 9월에 정식으로 창립한 시카고 한인 제일연합감리교회는 초대목사로 김창준 목사가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목회자로 있었고, 1936년 6대 목사로 이은택 목사가 미감리교 본부로부터 보직을 받고 부임하여 1964년까지 28년간 훌륭한 목회활동을 하여 한인 사회의 중추역할을 담당했으며 시카고 한인사회 발전에 중추적인 활동을 해왔다.
시카고의 이민사도 따지고 보면 교회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2년 시카고에 한인 감리교회가 예배당을 마련했으며 이 곳을 중심으로 한인사회가 발전해 나갔다. 시카고에 처음으로 한인교회가 생긴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시카고를 거쳐 간 인물들은 해방 후 건국 초기 대한민국의 요직에서 활동한 쟁쟁한 인사들이 많은데 우리가 알 만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조병욱(정치가), 황선수(목사,국회부의장), 김태선(서울시장), 김활란(이대총장), 고황경(서울여대 설립자), 김제식(김규식박사 동생), 오천석(문교장관), 최규남(문교장관), 윤일선(서울대총장), 노재명(충북대총장), 전규홍(일본중앙대 교수), 이유선(성악가), 현제명(음악가), 홍난파(작곡가), 김훈(상공장관), 류형기(감리교 신학교장), 한승인(서독 공사)등이 있으며, 미주에서 활동한 김경(1912년 시카고에 정착), 강영소(국민회 중앙 총회장), 나재원(교회이사장, 사업가), 염광섭(북미 유학생 총회장), 황창하(한인학생회 회보 주필) 등이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1930년대 시카고 지역의 한인수는 모두 1백 명 미만으로 미 정부 인구 조사국이 발표했다. 창립 76주년을 맞는 감리교회는 지금도 한인타운 로렌스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면 현재 시카고에는 300여개의 교회가 산재해 있고, 그 중 30여개의 교회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40년대 프레드 오(현재 치과병원 운영)는 시카고 노스웨스턴 치과대학에서 공부했고 그의 스승이 정보라 박사였다. 정보라 박사는 한인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자로서 에반스턴 명예총영사의 추대를 받았고 교포사회 발전을 위해 큰 영향을 미쳤다. 프레드 오가 벨몬트와 클락거리에 치과병원을 열면서부터 초창기 시카고 한인 이민역사의 한 장이 되는 한인타운이 이곳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48년경에는 많은 유학생들이 시카고로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후 계속 유학생들이 늘어나면서 한국유학생협회, 한국의료협회, 그리고 한국가족협회등이 설립되었는데 이들이 성장기동안의 대표적인 활동단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에는 한국인들이 행상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중국인들은 세탁소를 많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한국인 행상들은 이 세탁소를 찾아다니면서 비누등 세탁소에서 필요로 하는 상품들을 팔았다고 한다. 
1957년에는 학생회가 조직되었는데 초대 학생회장에는 정보라씨(포드딜러 사장이었던 김우형씨 장인)였으며, 1940년대의 시카고에는 나재원씨가 있었는데 이분은 마샬필드 백화점에서 꽃집을 경영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으면 그 부인이 음악을 좋아하여 오케스트라 홀을 빌려 부인으로 하여금 음악회를 갖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김여택씨는 브로드웨이와 포스터길에서 꽃집을 운영했으며 후에 상록회(당시 신현정 총무,현 목사)이사장을 하다가 시카고에서 타계했다. 또한 한승교씨라는 분은 Lake Geneve에 큰 빌라를 구입해 식당을 운영하면서 한인 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고 하며 임영신(초대상공부장관)여사와 결혼 했다고 한다.
1965년 케네디 대통령이 선포한 새로운 이민법에 힘입어 60년대 후반에는 독일에 취업했던 광부와 간호사들이 시카고에 많이 이주했다. 간호사들은 주로 병원에 취업을 했으며 다른 이주자들은 소규모의 작은 업체를 경영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기에 이르렀다. 점차 한인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많은 단체들이 생겨났고 그 중 시카고 한인회화 한인봉사회가 날로 팽배해지는 한인사회의 애로사항을 대변하는 봉사기관으로 발전했다. 한인들의 증가에 따라 장로교 교인들이 많이 늘어났는데 한인 감리교회에 다니던 장로교 교인들에 의해 장로교회가 창립되었고 1980년까지 교회가 급증하여 150여개로 늘어난 교회는 왕성한 종교 활동을 펼치게 된다. 70년대 초부터 한인 타운의 거리라고 할 수 있던 클락은 도매상가로 변해 아직도 상거래의 귀감이 되고 있는 한인업소들이 즐비해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한인사회가 크게 발전을 거듭한 20년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때까지만 해도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생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이민법의 개정으로 동양 사람들도 차별 없이 유럽 사람들과 같이 영주권을 얻을 길이 열려 많은 사람들이 큰 무리 없이 영주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영세적이긴 하지만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 소규모나마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봉급생활자보다 여유를 갖게 되어 집도 먼저 장만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한인들은 클락과 벨몬트를 중심으로 애디슨까지의 사이에서 영세적인 사업을 하고 있었다. 
1962년경에 코리아 하우스라는 식당이 브로드웨이와 벨몬트 근처에 있었는데 쟌 최와 이한식 씨와의 동업이었으면 결혼식 음식값이 1인당 5불 정도였다고 한다. 이 때 이곳에 있었던 상점들을 보면 삼미장(박수영), 안공예사(안동순 후에 아시아나,서기곤 현재 목사), 고려식품, 동아식품(모방현), 서울식당(정찬수, 후에 링컨에 행복원 운영), 한국일보사(발행인:김용화, 편집국 책임자:현 감리교 목사인 조은철)등이었다. EH한 아리랑 식품(박영기), 만나당, 김두환(여행사, 동아일보), 서울서점(권혁진), 한문수 공인회계사, 중앙식품(4900대 클락), 코리아 하우스(변효연의사, 후에 한인회장 및 평통협의회장 역임), 통관업을 하는 신영철씨가 있었고 무역업을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한인봉사회도 이 곳에 있었지만 4400대 클락으로 자체 건물을 사서 이사를 했다가 후에 캘리포니아와 몬트로스 현 건물로 이사했다. 클락과 벨몬트 근처에서는 상가가 많지 않아 소매상을 할 만한 가게를 얻지 못해 어려움을 겪게 되자 가게 수가 많고 가게 세가 싼 곳을 찾은 곳이 바로 로렌스이다. 로렌스에 처음 들어간 한국 가게는 로렌스 사진(김정식), 중앙식품, 로렌스안경(민병하), 브린마선물센터(이석우), 삼오정, 동서식품 등이며 이렇게 한인들이 상가건물을 사들이자 가격이 청정부지로 상승하기 시작했고 비어있던 상가들은 새로 단장하여 한인들의 가게가 즐비하게 되었으면 클락길(4400대)에는 많은 도매상들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소매상들은 점차 클락에서 로렌스로 옮겨오게 되어 로렌스는 한인의 거리가 되었으며 한복 차림에 고무신을 신고 아기를 등에 업은 할머니들도 눈에 많이 띄게 되었고, 시의원의 협조를 얻어 장영준(반도회관 주인, 전 한인회장)씨가 주동이 되어 "Seoul Drive"라는 거리 명을 얻게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 한인들이 적은 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남부 흑인촌의 가발가게와 옷가게, 보석가게등이었다. 시카고에 처음 이민 와서 단동 2~3천불만 있어도 작은 가게를 낼 수 있었으면 한 가족의 생계비는 벌 수 있었다. 또 가발가게는 중노동이 필요 없고 유창한 영어도 필요치 않았기에 가발가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이들 가발가게는 한인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옷가게도 마찬가지여서 가죽가방, 가죽옷, 전자, 운동화, 보석소매상등도 같은 형태로 확장해 나갔다. 한국정부도 이에 발 맞추어 수출붐이 일어났고 이와 동시에 이들 소매상들에게 상품을 공급하는 도매상들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런 일련의 일들이 한인사회를 일으키는 데 한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한인사회가 커짐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이에 부수적인 사업들인 금융관계, 보험, 자동차, 여행사, 부동산, 회계사, 식당 등 한인을 상대로 하는 사업이 성하게 되었다. 물로 남부에서 하는 사업의 규모도 2~3배 커지게 되었으며 다양하게 되었다. 또 서비스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여 청소업, 세탁업, 자동차 정비, 미용실, 이발소, 구두수선, 꽃집, 장의사, 전자수리, 집수리등 없는 업종이 없을 만큼 많아지고 커져서 한인들끼리 경쟁을 하게 되었다. 현재 한인들이 주로 하고 있는 업종 중에서는 도매업과 흑인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잡화상, 머리를 치장하는 흑인용 머리약 소매상, 세탁소등이 비교적 안전한 업종이라 하겠다.
1997년 현재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교외 지역에 한인들을 주고객으로 한 사업체 수가 1,653개이고 시카고 북부 로렌스, 링컨, 피터슨, 브린마등에 있는 업소는 1,091개나 된다.
여기에 미국인을 주 고객으로 하는 업소와 남부에 있는 업소수를 합치면 그야말로 60년대에 비해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큰 발전이며 경제 규모 면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세탁소를 보면 한인들이 경영하는 세탁소 수는 일리노이 주에 있는 전체 세탁소 수의 60%를 차지하고 있는데 97년 현재 1,256개라고 한다.
현재 시카고에 있는 봉사단체수는 18개이며 향군단체 7개, 사회단체 34개, 일반단체 20개, 문화예술단체 28개, 체육단체 29개, 순 골프클럽 9개, 향우회 10개, 중고등학교동창회 59개, 대학동창회 37개 등 99년 현재 총 251개 단체가 나름대로 설립 목적대로 활동하고 있다.
시카고 영사관 관할 13개 주에 거주하는 한인수는 99년 6월 현재 약 20만 명으로 추산되면, 일리노이 주에는 14만 1천명이다. 한인들은 대부분 시카고 북부와 가까운 북부 교외인 스코키, 그렌뷰, 노스브룩, 몰튼그로브, 링컨우드, 버팔로그로브, 윌멧, 샴버그등지에 살고 있다. 70년대 초반에는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던 주택 평균가격은 45,000불이었으면 80년대 후반에는 15만대, 90년대 후반인 1999년에는 25만대 전후이다.
한인들의 경제와 사회적인 규모와 활동이 커짐에 따라 금융업도 함께 커지게 되어 한국계 은행들이 4개, 순 한국교포 은행 1개, 주택융자와 미국계 은행으로서 한국부를 두고 있는 은행이 수십 개에 이르고 있다. 어떤 은행은(70년대 초반) 한국인들의 돈이 그 은행 자본의 3/4에 육박했다고 하니 정말 한국인들의 경제적인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차후 10년 후의 한인 사회는 현재보다 훨씬 큰 규모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와같이 한인사회가 불과 20~30년 사이에 비약적으로 커짐에 다라 변호사들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1964년에는 심기영씨(한인회장 역임)가 다운타운에 사무실을 열었는데 이것이 미국 최초의 한인 변호사 사무실이었으며 이어 김봉현씨가 다운타운에, 김정흠씨가 로렌스에 개업을 했다. 또 1971년에 클락길 3800대에서 김용화씨는 한국일보 지사를 열고 1페이지에 현지판을 인쇄했는데 1번 독자가 안동순(가나안교회 장로)이었으며 주 광고주는 서울식당(정찬수), 안공예사와 고려식품이었다고 한다. 지금 로렌스와 켓지길에 있는 무궁테라스는 1969년에 시작하여 1972년에 완성되었는데 여기에는 75세대의 한국 노인들이 평화스럽게 살고 있다. 이 무궁테라스는 당시 봉사회가 연방주택성의 대행기관으로서 신현정 봉사회 사무총장, 차응만(의사), 이중식씨등이 주동이 되어 미연방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건립되었다. 이 무국테라스 노인 아파트는 미국에서 한국인 노인아파트의 효시로서 후에 디트로이트, 플로리다, LA봉사기관에서 이를 배워가서 같은 사업을 했다고 한다. 두 번째 노인아파트인 코람(60세대)도 역시 같은 사람들이 같은 방법으로 주동 역할을 하여 완성되었고 현재 한국노인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으며 이 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몇 년씩 대기해야 한다고 한다. 이 아파트 훨씬 전에도 감리교에서 장로교 교회가 독립하여 한인 사회에 두 번째 교회인 릴리와 링컨 근처에 릴리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장로교회에서 아미테지와 할스테드에 건물을 구입해 유학생들에게 방을 빌려주기도 했으나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1981년 8월 15일에 개관식을 가진 현 한인회 건물(5941 링컨)은 심기영씨가 13대 한인회장을 역임할 때 주동이 되어 17만불을 5년에 걸쳐 모금, 13만 3천불 현금을 주고 구입한 것으로 이것이 미국 전국에서 최초로 한인회 자체 건물을 시카고 한인회가 갖게 된 것으로 자랑할 만한 일이다. 돈은 13대 때 모금했으나 개관은 15대 김창범 회장 때 하게 되었다. 이 모금 때 3천불이상 기탁한 개인 3명은 심기영 1만불, 차락우 6언불, 안동순 3천불이며, 나머지는 2천불에서 50불까지 여러 교포들이 헌금을 했다. 이 모금에 참여한 개인은 309명이고 단체와 회사는 49개이며 제일 많이 낸 회사는 쇠를 무역하는 아모콘(윤문상)으로 14,000불이다

시카고 한인회는 1963년에 시작하여 제 1대 회장이 정보라 박사였고, 제 2대는 김봉호씨(의사)였으며, 제 2대 한인회장 선거 겸 총회 때 모인 사람이 28명이었고 장소는 감리교회였다. 1980년에 들어와서 공식적인 한인회 회칙이 제정(회칙 제정위원장 이병희)된 이래 24대까지 내려오면서 수차에 걸친 회칙 개정은 물론 한인회 회장선거를 위한 선거법도 만들게 되었고 공탁금을 예치한 선거전을 치열하게 벌린 때도 수차례 있었다. 여러 회장들이 자비를 들여 봉사를 많이 했지만 특히 16,17대 회장이었던 박중구 전 회장은 한인회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 주류 정치사회에 정치헌금을 하는 등 한인회의 존재를 내외에 알리기 위해 많은 홍보를 했다. 제 20대 정해림 회장은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시청과 주정부로부터 많은 기금을 마련하여 한인회의 경제적 기틀을 잡은 회장이다. 현재 시카고 한인회는 미전역에서 가장 크고 모범적인 한인회로서의 면모를 날로 일신하고 있다.
1968년도에 안동순씨(전 기독교방송국장, 이사장)가 5000대 벨요트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1주일에 한시간씩 시간을 얻어 한국어 방송을 했는데 이것이 미국 땅에서 한국말 방송의 효시이며(미국의 소리 방송은 미국정부 후원이었음) 이 첫 방송을 삼미장 식당에서 몇 사람이 들으면서 가슴이 찡했다고 한다.
1972년도에 강희중, 유호열, 안동순, 김용화씨 등이 중심이 되어 한국실업인협회(초대회장은 신영철, 통관업)가 조직되었고 얼마 후에 상공회의소(초대회장 양대진, 보험업)가 실업인 협회로부터 양대진씨가 주동이 되어 독립되었는데 이 상공회의소는 미국내의 한국인 상공회의소 중에 유일하게 자체 건물을 마련한 것이다.(강준용 회장 때). 브린마에 위치한 상공회의소는 매년 8.15를 기하여 한국인 거리축제를 하는데 한국 고유의 특산물, 음식, 무용 등을 선보여 곳곳에서 1~2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이 축제에 참여한다. 남부 상인들이 모인 남부 상우회도 1년에 한번씩 추수감사절을 전후하여 Food Basket이란 행사를 하는데 흑인들과 한인들이 한데 모여 우의를 다지는 큰 행사 중 하나이다.
또한 1971년에 첫 일간지 한국일보가 창간되면서 언론의 급성장을 보여 한국일보에 이어서 중앙, 동아 등 3대 일간지가 교포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본국소식과 미주 각 지역, 시카고 현지소식을 매일 전해주면서 이민역사의 산 증인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한국방송(KBI:라디오), 한인 기독교 방송(KCBS:라디오), 한미 TV(KBC)를 비롯, 미주신보, 크리스천 저널의 주간신문이 교민의 권위와 발전, 홍보 등을 대변하는 주요 매체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이역만리의 낯설고 물설은 기외의 나라 미국을 동경하면 태평양을 건너온 이민의 물결은 80년대 중반까지 최고조에 달했고, 이민 쿼터가 묶여서 체적현상까지 겹치게 되자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한편 체험으로 겪은 이민 생활의 애로 사항을 영상 매체를 통해 보고, 듣고, 교포의 잦은 모국방문을 통해 현지의 사실을 알게 된 본국의 이민 행렬은 현저히 줄어들게 되어 1990년에 들어서면서 한동안은 역이민 현상까지도 초래했었다.
한인들은 근면, 성실을 밑천으로 하여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룩하면서 명실 공히 소수민족으로서 주류사회로부터 각광받는 우수 민족이라 인정받게 되었다. 그 예로 1982년 5월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퍼레이드(행사위원장 이병희)가 시카고 중심가인 다운타운 디어본 거리에서 수십만의 인파가 운집하여 한인들의 존재와 위상을 과시하며 진행되었고, 1992년 8월에는 다시 꽃차 60대와 의장대. 군악대. 기마대등이 동원된 퍼레이드가 성공리에 치러져(행사위원장 이병희) 이는 한인의 위상을 제고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으며 미 주류사회 진입 도약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 후 2년마다 한 번씩 추석명절을 기념하는 '한인의 날'축제행사가 한인 타운의 중심가인 로렌스거리에서 성대히 거행되어 왔으며 , 92년도에는 10년 만에 두 번째로 시카고 다운타운 중심가에서 한국의 날 퍼레이드를 벌여 한국인의 위상을 다시 한번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 많은 단체들이 조직되어 직능별로 세분화된 주류 속에 '한국인 심기'에 심혈을 기울여왔고 2개의 노인아프트 건립을 비롯, 2세들에게 민족의 얼과 뿌리를 심어주기 위해 산재해 운영하던 한글학교를 통합한 '통합한국학교'가 발족하여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심어주면서 미래의 한국문화 전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한 80년대에는 한인학교 연합회가 발족하여 세배행사나 경로잔치, 윷놀이, 정월대보름 놀이등 고유 전래의 한국민속 놀이를 통한 한국 전래 문화와 주류 사회와의 교량역할에 역점을 두는 민족의식 교육에 주력해 왔으며, 시카고 지역 및 주변에 위치한 약 300여 교회의 협력으로 88년, 92년, 96년에 걸쳐 세계 선교대회를 개최함으로서 크리스천 한국인 특유의 복음화 운동에 앞장섰던 일도 한인 이민사회에 주목할 만한 활동이라 하겠다.
새 천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는 2000년에도 사상 최대의 계획 아래 대회를 추진 중이다. 교육 분야에도 빛나는 성장을 거듭하여 많은 유학생들이 한국인의 거리라 할 수 있는 로렌스 지역의 사업체를 찾게 되고, 교환교수 및 연수 세미나 등을 통한 한국 알리기에 발걸음을 재촉해 왔다.
주류사회에도 도전하여 정계에도 한국인이 소수민족으로서 명실 공히 두각을 나타내기에 이르렀고, 각 계에 활발한 진출을 통한 한인 교포의 위상을 과시해 오고 있다. 한인사회의 발전은 이중 언어교육, 유명대학에 세워진 한국학개설, 공립학교 한국학 개설노력으로 이어져 왔고, 이를 통해 결실을 맺는 차세대 주자로서의 교량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선교활동과 정부로부터의 교민 정착 지원, 노인복지 혜택등 앞으로 예상되는 노인인구 개발 문제에 한인 사회복지회, 한인 노인복지회등이 참여하면서 한인 사회의 차후 노후문제데 발 빠른 대책을 강구함과 동시에 향후 발생될 복지나 건강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예방책 및 노후 복지 수립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발전의 견인차 역할로 평가되어 온 교민의 사업체도 다양하여 시카고 남부지역에서 발생하는 한흑갈등의 연속으로 발전에 저해되는 일도 있었지만, 흑인 지역에서 주로 사업을 하는 상인들의 모임인 남부 상우회를 통한 중재 및 조정, 슬기로운 대책과 지원들을 통해 원만히 상부상조하는 이웃으로 탈바꿈되고 있음은 커다란 희망이 아닐 수 없다.
한인사회는 시카고 인근지역까지 20여 만 명이라는 미주 3대 한인교포 지역을 형성하면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직능별로 50여개의 크고 작은 단체와 300여개의 교회, 사찰, 천주교등 종교면에서도 상당한 발전을 거듭해 왔을 뿐 아니라 이들 단체들을 배경으로 1963년 태동한 시카고 한인회는 24대에 걸치기까지 이민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으며 한인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미 주류사회와 유대관계를 꾸준히 맺고 있다. 한인 밀집 지역으로 꼽히는 로렌스 거리는 '서울 드라이브'로 명명되었고, 시의회에서의 의결로 인한 코리언 파워를 주류사회 속에 심는 빛나는 위상을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1993년 2월 13일에는 아시안계 12개국이 모여 아시안의 화합과 단결을 염원하는 축제모임이 한인회 주관으로 일리노이 주지사, 시카고시장, 상원의원등을 비롯한 약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치러졌고, 한인회 역사상 유래 없는 거액의 예산(12만불)을 시정부로부터 받아 이민 초기 정착자들의 직업 훈련을 비롯한 안정된 직업전선의 밑거름이 되었다.(제 20대 정해림 회장, 차락우 이사장)
한인사회 민족의식과 뿌리의식을 보존, 함양하기 위한 한국어 교육, 경로사상 고취, 전통문화 고수에 노력하고 있음은 물론 미국사회에 한민족의 위상을 높이고 지속적인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풍요를 누리기 위해 지혜와 인내와 응집력을 중심으로 인화단결하고 있으며, 희망찬 내일을 위해 우수 두뇌의 확보를 지원하며 이민 개척의 새로운 장을 열고자 정진 하고 있다.